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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소중한 경험들

서울의 봄 : 12.12 군사반란

by CODINOTE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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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태양(박정희)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 같은 마음' 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경상도 출신의 육사 11기들의 모임.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 이후 국가의 1인자부터 3인자까지 권력 공백이 되어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의 현장 검증 사진이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

국가는 이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당시 육군 참모 총장이었던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0.26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사령관이 임명된다.

 

저격 사건 이후 국민들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던 반면, 군 내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당시 전두환은 정총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처음엔 정총장을 회유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바로 2억을 건네며, 청와대 비서실 금고에서 나온 돈 중 일부라고 말했고, 이는 기록되지 않은 돈이라며 회유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건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 때 정총장은 전두환 사령관이 국방장관에게도 회유를 시도했던 걸 알게 되었다.

이후 정총장은 전두환 사령관의 힘이 강해지는 걸 경계했고, 이를 위해 국방장관과 조치 여부에 관해 갈등을 빚게 된다.

그리고 이 때문인 지 전두환 사령관의 좌천 소문이 군 내부에 돌기 시작했다.

 

결국 회유에 실패한 전두환은 정총장을 끌어내릴 계획을 세우게 되고 작전명 '생일집 잔치'를 시작한다.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정총장을 10.26 사건 때 김재규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를 하려 했고,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총장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재가 후 정총장의 귀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안됐기에, 전두환은 정총장 체포와 대통령 재가 작전을 동시에 펼치게 된다.

 

1979년 12월 12일

그렇게 12월 12일 밤 작전은 시작되었다.

 

이 작전에서 전두환은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인물 셋을 불러들인다.

바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 현병감, 정병주 특전사령관이었다.

 

저녁 6시 30분, 이 셋을 연희동 잔치에 초대하여 이들을 유인하였고, 정총장 체포와 대통령 재가 작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생각과 달리 해당 사항을 바로 재가해주지 않았으며, 국방장관과 함께 논의 후 결정을 하겠다며 반려하였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체포조는 위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정총장의 공관에 들어간다.

그리고 총격전과 함께 결국 정총장을 납치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연희동의 인물 3명은 곧바로 진압군을 꾸려 진도개 하나를 발령한다.

그렇게 역사상 가장 긴 밤이 시작되었다.

 

역사상 가장 긴 밤의 시작

진압군은 전두환을 비롯해 이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이들을 진압하기로 한다.

그리고 진압군이 투입하기 위해서는 계엄사령관의 명령이 필요했다.

하지만, 계엄사령관은 이미 납치가 된 상태였고, 그렇기에 국방장관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국방장관은 이미 총장 공관에서의 총격 소리를 듣고 난 뒤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다.

결국 진압군은 지휘 공백 상태로 진압 작전을 투입하지 못한 채 초조한 상태로 대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란군 역시 대통령 재가를 위해서는 국방장관이 필요했기에 초조한 상태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전두환은 결국 진압군을 회유하기 시작했지만, 장태완 사령관, 정병주 사령관의 회유에 실패하게 된다.

 

회유에 실패했으니, 어떻게 했겠는가?

결국 군사적 투입을 명하게 되었다.

 

바로 1공수부대를 출동시킨 것.

물론 1공수부대의 사령관은 특전사령관인 정병주 장군의 예하 부대였지만, 1공수 여단장이 하나회의 일원이었기에 정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 하고 출동시킨다.

(당시 하나회에서는 직속상관보다도 우두머리인 전두환의 명령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진압군은 이들을 막기 위해 9공수부대를 서울로 출동시킨다.

 

1공수와 9공수가 모두 서울에 도착하고, 충돌하게 된다면 정말 전쟁 그 자체가 될 수 밖에 없기에 진압군은 어떻게 해서든 1공수의 서울 용산행을 막아야만 했다.

장태완 사령관은 이를 막기 위해 서울의 한강 다리를 다 막았고, 1공수는 행주대교로 우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9공수가 빠르게 서울로 진입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결국 전두환은 먼저 진압군에게 제안을 하게 되었다.

1공수를 복귀 시킬테니 9공수도 복귀 시키자는 신사협정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것은 막고 싶었기에 진압군 측도 이를 승낙하고 9공수를 다시 철수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는 전두환의 거짓 제안이었다.

1공수를 먼저 서울로 투입시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하기 위해 진압군을 감쪽같이 속인 것이다.

 

결국 9공수를 돌려보낸 진압군은 1공수의 서울 진입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그대로 국방부와 육본을 장악하며 서울의 길고 긴 밤은 끝이 났다.

 

그 후, 전두환은 국방장관을 찾아 정총장 체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받아내게 되고, 그렇게 전두환과 신군부의 세상이 되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찍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단체 사진이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찍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단체 사진

이후의 이야기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

국민들은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을 기대했지만, 하룻밤 사이 일어나 나와보니 거리엔 탱크들이 나와있고, 이미 기대와 반대되는 세상이 되어있는 걸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반란군에 맞섰던 이들에게는 정말 안타깝고, 슬프고, 억울한 결과가 찾아왔다.

 

정승화 총장은 4스타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전역을 하게 되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 후 6개월 가택연금,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잃게 되었다.

정병주 사령관도 역시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을 당했다.

그리고 88년 어느 날,외출 이후 실종이 되었고, 빈 부대막사에서 사망한 채 발견 되었다.

여러가지 의혹은 있었지만, 자살로 사건은 종결이 되었다고 한다.

김진기 헌병감은 준장 신분으로 자진 예편하였다.

 

 

1995년 11월 24일,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으로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전두환과 노태우가 피의자 신분으로 구속되었다.

중간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 형을 선고 받는다.

 

하지만, 2년 뒤 이들은 특별 사면을 받고 출소하게 되었다...

 

 

마무리하며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다.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를 보고난 뒤 관련 영상을 찾아보면서도 정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https://codinote.tistory.com/190

 

서울의 봄 영화 후기

1979년 12월 12일 발생한 12/12 군사반란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평소 역사 관련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개봉하기도 전에 기대했던 영화이고, 개봉하고 바로 보러 다녀온 영화이다. 이 영화는 예

codinote.tistory.com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를 막았더라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

억울한 희생은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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